언론 보도

뉴욕 최초의 한국어 학교(한국일보) 2010.01.25 입력

작성자
Naksnec
작성일
2020-07-24 15:50
조회
2033
뉴욕한인 125년 (43) 김형린, 뉴욕 최초의 한국어학교 설립
입력일자: 2009-08-31 (월)
2세 한글교육 제대로 시켜보자는 '애국운동'

요즘 미국에서 자라나는 한인 2세들은 한글이나 한국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70-80년대만 하더라도 부모들이 정착하느라 바빠 자녀들에게 한글을 깨우치게 하는데 관심도 적었거니와 형편이 닿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모국어로서 한국어 교육보다는 영어 배우는게 급선무라는 인식이 박혀있었기 때문에 자연 한글 배우는 일에는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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젋은 시절의 김형린과 부인 김랑


교회 다니는 가정은 그나마 교회에서 운영하는 주말 한글학교가 있어서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아쉬운 대로 기초공부는 할 수 있었다. 또 모든 교회가 한글반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었다. 초기 이민사회에서 모국어 교육을 받기가 그만큼 힘든 시기가 있었다. 뉴욕에서 2세 자녀들을 위해 한국어학교를 처음으로 개설한 것은 1962년 12월. 김형린이란 개인이 세운 뉴욕한국어학교였다. 뉴욕한인회 창립 당시 실행위원으로 참여했다가 3대 회장에 선출된 김형린이 그동안 마음속으로 계획했던 국어쓰기 운동을 펼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
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미국유학생으로 교육심리학을 전공했던 그인지라 자기 전공을 살려 2세들에게 한글교육을 제대로 시켜본다는 일종의 애국운동 이었다.

한인회 집행부 인사들과 그가 다니던 뉴욕한인교회 교인 자녀들을 모아 맨하탄 115가 교회 2층에서 주말을 이용, 한글을 본인이 직접 가르쳤다. 국어쓰기 외에 음악시간에 동요도 가르친 결과 이듬해인 63년 9월29일에는 한인회 사업으로 한국어학교 학생들의 '어린이의 밤' 공연을 브로드웨이 장로교회(미국교회)에서 가졌다. 이날 찍은 기념사진에는 학생이 모두 28명, 절반 정도가 한복을 입었고 그 가운데에는 미국 어린이도 6명이나 되었다. 학생보다 학부모와 한인회 관계자들의 수가 더 많았고 때마침 뉴욕을 방문 중이던 백낙준 전 문교부 장관의 얼굴도 보였다.

교회당을 빌려 쓰던 한국어학교는 웬일인지 이듬해 브루클린으로 장소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고 70년대에는 퀸즈 67가 우드사이드 애비뉴 소재 제7일안식교회를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무렵 운영이 힘든 가운데에도 열정을 가지고 한국어학교를 계속하던 김형린을 몇 사람의 독지가들이 도와주었고 그 가운데 유학생 출신의 김정희 등 소장파들이 어려움에 처한 전직 한인회장을 십시일반으로 후원했었다는 것. 이 학교는 80년대 중반 김형린이 90에 가까운 나이에도 운영했던 것을 필자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광복절을 기념해 한복입은 어린이들을 방송에 출연시키는 열성도 보였다. 이때 출연했던 어린이들이 지금은 어엿한 중년이 되어있을 것이다. 김형린은 일제시대 교육을 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어떤 내용의 한글교육을 시켰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현대식에 미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란 추측이 들고 무척이나 운영이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열성적으로 국어쓰기 운동에 앞장선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한국어 교육 공로자인 허병렬(뉴욕한국학교 교장)은 김형린을 "뉴욕의 발전사에 꼭 포함시켜야 될 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교육이 전공이었고 사명감 또한 투철했던 인물로 미국사회와의 교량역할도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국어와 관련해서 뉴욕한인사회에 초석을 놓은 분으로 규정했다. 김형린 다음으로 교회가 직접 운영한 한글학교는 뉴욕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뉴욕한인교회가 1966년 11월에 시작한 한글학교였다. 당시 교육부장이던 한영교 목사(뉴욕한인회장 역임)가 책임운영을 했는데 그는 뉴욕거주 한국인 가족, 어린이들에게 한글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침으로 장차 그들이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어와 문화를 소개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그 취지를 밝혔다. 학교는 뉴욕총영사관의 보조도 받으며 운영됐다. 주일날 예배전인 아침 10시30분부터 11시10분까지 40분간 교사 2명과 15명의 학생으로 출발했다. 69년 1월10일에는 컬럼비아대 호레이스 만 홀을 빌려 뉴욕지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 동화대회도 주최했다.

제1회 어린이 동화대회에 어른 포함 3백여명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름방학 중에는 뉴욕일원 4개 교회학교가 함께 참여하는 연합 여름캠프를 조직적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초창기 교사로는 허병렬, 변금일(윤선오 장로 부인), 박남옥 등이 가르쳤다. 허병렬은 한국에서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력을 지닌 교육가 유학생 출신으로 1973년 체계를 갖춘 본격적인 한국학교 '뉴욕한국학교'를 창립한 인물이다. 그는 36년 역사를 가진 이 학교의 교장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로 뉴욕지역에는 수없이 많은 교회 한글학교와 각종 한국어 학교들이 설립돼 85년에는 재미한인학교 동북부지역협의회가 창립되는 등 한글교육을 위한 협조체제가 생기고 뉴욕총영사관에 교육위원회가 설치되어 한국정부가 지원하는 추세로 변했다. 또한 97년부터는 미국 대학입시의 한 부분인 SAT2에 한국어가 공식 채택되어 현재도 많은 학생들이 이 시험을 치루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허병렬, 이광호, 이선근, 이경희, 김근순, 김송희 등 한국어를 사랑하는 초창기 교육자들에 의해 그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이어 2007년부터는 미국 공립학교에 한국어가 제2외국어로서 공식 채택되도록 권장하는 사업이 추진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47년 전 외롭게 한국어 학교를 시작했던 김형린의 맥이 여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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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뉴욕한국어학교 학생들이 참가한 '어린이의 밤' 행사를 마치고 찍은기념사진.

▲노력형 학구파 김형린 … 뉴욕서 57년 산 올드타이머

1899년 평북 강계 출생으로 한국에서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던 김형린은 1919년 숭실전문에서 시작된 평양 만세사건에 가담했던 인물로 졸업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1년 미국유학의 길에 올랐다. 캘리포니아대를 다니다가 듀북대서 심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시카고 대학서 심리학과 교육심리학을 연구했고 하버드대서 박사과정 수료, 다시 컬럼비아대서 교육심리학 석사학위를 받은 노력형 학구파. 한때는 화초장사와 케이터링 비지니스도 운영하며 그역시 독립운동가 였던 부인 김랑과 함께 맨하탄 그리니치 빌리지서 살았다.

1933년 부터 90년 타계할때 까지 57년을 뉴욕에서 보냈고 77년 부인과 사별했다. 외로운 노년을 보내던 80년대 중반 필자는 해방전 유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리니치 빌리지 23 커머스 스트릿 2층 허름한 방으로 그를 가끔 찾았다. 냄새도 좀 나고 정리가 안된 방에서 그는 함경도 사투리를 써가며 경제
공황때 어렵사리 고비를 넘긴 얘기도 들려주었다. 옛날 기억을 되살리느라 한두시간은 휘딱 지나갔고 발전된 서울의 모습을 보고싶다던 그는 87년 3.1절때 뉴욕한인회의 도움으로 한국방문 소원을 이룬뒤 90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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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친척이 운영하던 5애비뉴 식당에 가끔 나타나 식사하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